2025. 2. 22. 23:12ㆍ내고향 사천
곤양대접주(昆陽大接主) 죽포(竹圃) 이규정(李奎井)
1846년 ~ 1914년
초휘는 규팔(奎八), 자는 문오(文五)
강양군(江陽君) 이개(李開)의 30세손, 목사공(牧使公) 이공주(李公柱)의 21세손, 곤양(昆陽) 입향조 이시양(李時陽)의 7세손, 아버지는 이만희(李晚𤋮),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상추(權尚樞)의 딸, 배위는 해주정씨 정광철(鄭光轍)의 딸
곤양 솥골 사람으로 곤양대접주(昆陽大接主)로서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 참가하는 등 포교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자 굴하지 않고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 기치를 들고 농민봉기(農民烽起)에 앞장 서 농군규합(農軍叫合)에 활약하였다. 9월에 영호대접주 김인배(金仁培)와 합세하여 하동부를 점령하였고 이어 곤양읍성을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다솔사에 동학군을 주둔시키고 세를 늘려 9월 17일에 진주성을 점령했다. 10월 13일에는 금오산 전투와 하동 고성산성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체포령이 떨어져 가문(家門) 전체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고, 이규정은 곤명 송림에서 은신하였는데 그를 도왔던 강씨 일가가 곤양군영(昆陽郡營)에서 고형(苦刑)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각지에 떠돌며 숨어살았고 은거지를 바꿀때마다 관헌(官憲)이 들어닥쳤으나 자부 김씨(子婦 金氏)의 극진한 효성으로 살아남았다. 아들 이기호(李箕鎬)는 1895년 31세에 관헌에게 체포되어 곤양군영(昆陽郡營)에서 1년 동안 투옥되었고 다시 진주감영(晋州監營)에 이송돼 복역하다가 3년만에 불구의 몸이 되자 가출옥 하였으나 장독(杖毒)으로 횡사(橫死)하였다.
또한 곤양민란 주도자 이규선(李奎煽)과 10촌 족형제간이고 독립운동가 이범호(李範鎬)와 재종숙질간이며, 독립운동가 이경호(李景鎬: 규선의 자)와 11촌 족숙질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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